생성 시기: 고려, 1389년(공양왕 1년)
유래: ‘퇴(退)’라는 글자를 뜻하는 말

조선시대에는 조정으로 올려 보내는 물건들을 일일이 점고했다. 이 때 물건의 질이 낮아 도저히 위로 올려 보낼 수 없으면 그 물건에 ‘退’자를 찍거나 써서 다시 물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돌려보낸 물건을 가리켜 ‘퇴자 놓았다’고 했다. 요즘의 쌀 수매 현장에서 품질을 나타내기 위해 찍는 도장과 비슷한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세금과 함께 관청이나 궁궐에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바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세금을 공납, 바치는 물품을 일컬어 공물이라고 한다. 이 공물을 거두어들일 때 품질을 검사해서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최종 책임자는 호조의 판적사(版籍司)라는 관리였다. 이 관리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엄격히 심사해서 합격한 물건은 통과시키고, 품질이 낮아 불합격 판정이 난 물건에는 물러날 퇴(退)자를 찍어 돌려보냈다.
결국 퇴자(退字)는 불합격한 공물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 말에서 어떤 일이 거절당할 경우 ‘퇴짜를 맞았다’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판적사가 소속된 호조는 고려시대에는 판도사(版圖司)라고 했고, 1389년(공양왕 1년)에 호조로 개칭되어 조선에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호조는 단순한 실무 집행기관이었으나 1404년(태종 4년) 관제개혁 때 정2품 아문으로 승격되면서 실무와 함께 정책 수립기관으로 강화되었다. 설치 초기에는 판적사, 회계사(會計司), 경비사(經費司)의 3사로 나뉘어 업무를 담당했다.
판적사는 호구, 토전(土田), 조세 부역 등 재부(財賦) 관계의 업무를 담당하였고, 회계사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 비축된 미곡, 포(布), 전(錢) 등의 연도별 회계 및 관리의 해유(解由) 등을, 경비사는 국용의 제반 경비 지출 및 왜인(倭人)의 양료(糧料)에 관한 사무를 나누어 맡았다. 선조 이후 업무가 늘어나면서 방(房), 색(色)이 신설되어 정조 즉위 초 판적사에 5방, 경비사에 9방을 두어 3사 14방 체제로 정리되었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어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어휘의 생성 시기는 판적사의 업무 성격상 호조라는 명칭이 처음 생긴 고려 공양왕 1년인 1389년으로 잡는다. 다만 그 이전의 판도사에서도 판적사 업무는 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때 퇴(退)라는 글자로 공물을 불합격시키는 사례가 있었을 것이다.